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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디자이너로서 수백 여개의 브랜드를 디자인해왔습니다. 기본 디자인 컨셉이 결정되고 나면 그 후에는 브랜드의 쓰임새를 규정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집니다. 수록되는 내용은 기본편과 응용편 두가지 파트입니다. 기본편에는 브랜드의 비전과 미션을 규정 등에 대한 개념과 브랜드 로고의 형태, 색상, 결합 방법 등 브랜드 디자인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설명이 들어가구요. 응용편은 기본편을 기반으로 명함이나 홍보물, 사인물 등 디자인을 어떻게 응용하고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과 기준을 담아냅니다.

이런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브랜드가 일관성 있고 체계적으로 사용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종 목표 고객들의 인식 속에 일관된 브랜드의 목소리와 메시지를 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브랜드가 매번 다른 목소리와 분위기로 일관성 없게 나타난다면 고객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요. 심하면 브랜드에 대한 신뢰감마저 단번에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브랜드 가이드라인은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침이 됩니다.

브랜드가 하나의 제국이라면 브랜드 가이드라인은 제국을 운용하는 기준이 되는 하나의 법전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브랜드 관련자들이 브랜딩을 실행할 때 필요한 실행 기준이 됩니다. 가이드라인이 존재하는 최종 목적은 고객에게 브랜드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만드는 거지만, 실은 내부적으로도 브랜딩에 관한 기준을 잡기 위한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장치입니다.

이런 일을 해오다 보니 퇴사 후 사업을 시작할 때도 자연스레 우리 회사만의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구나 내가 만들려는 회사가 브랜드 디자인과 컨설팅을 한다면 꼭 필요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의사가 제 병 못 고친다는 말이 있듯이 컨설팅 회사도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죠. 시간이 없어서 너무 어려워서 정작 자신들의 브랜드의 기준을 세우고 돌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창업 초기에 이런 기준을 잡지 않고 시작하면, 대부분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에 밀려 뒷전에 가 있기 마련이죠. 그런 상황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창업 초기가 우리 회사만의 비전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만들 적기라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을 놓친다면 회사가 문을 닫기까지는 어려울 영영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또한 사업을 하다가 방향이 헷갈릴 때, 주위의 유혹으로 흔들릴 때, 처음 먹었던 마음의 열정이 식을 때쯤 펼쳐보면 다시 사업의 길잡이가 돼 줄 그런 역할도 기대 했습니다. 더구나 저처럼 옆에 든든한 조언자가 없는 혼자 일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1인 기업의 비전 가이드라인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되더군요. 원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많이했던 질문들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왜 (Why), 무엇(What), 어떻게(How)라는 의문사를 앞에 두는 방법입니다. 일단 그렇게 질문을 던져 놓으니 조금 감이 잡히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3가지 의문사에 살을 붙여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완성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죠. 만약 이 질문들에 막힘없이 줄줄 대답할 수 있다면, 자신감을 갖고 당장 사업을 시작해도 된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단번에 대답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질문들이죠. 당장 답을 내리기 어려워 몇 날 며칠을 숙고해야 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업을 운영하는 도중 이런 질문들과 맞닥뜨렸다고 상상해보고 각 질문을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질문들에 대한 정답을 내린다기보다는 앞으로 펼쳐나갈 내 사업의 미래를 머리 속으로 그려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너무 딱딱하고 단호한 법전이 아니라, 내 사업의 비전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입니다.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묻는 말이죠. 내가 왜 이 일을 선택하게 됐는지, 어떤 비전을 품고 독립을 꿈꾸게 되었는지, 왜 그 게 나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이 일 말고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일이 있습니다. 왜 하필 이 일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따지는 일이다보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되겠습니다. 그 이유를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나의 고객들이 반대로 물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 일을 꼭 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라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사업의 비전과 미션, 핵심 아이덴티티, 핵심 능력 등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저희 회사의 답을 간단히 말하자면, 그동안 쌓아 왔던 전문성의 도구인 브랜딩과 디자인으로 세상과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거창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은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 일하는지에 대한 답은 찾았는데, 그렇다면 무슨 일을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할 것인가? 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대부분은 독립하면서, 이 일을 왜 하는 지에 대한 질문에는 답을 쉽게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답은 미리 하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속한 일 안에서 어떤 차별점과 경쟁력을 갖는지에 대한 생각은 나 스스로가 아니라, 내 주변의 상황이나 시대 환경 등을 고려해야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죠. 제 경우에도 ‘브랜딩’ 관련 일을 한다는 것에는 이유가 명확했는데, 그렇다면 브랜딩 서비스 중 구체적으로 어떤 걸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을 비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가면서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브랜딩 서비스 중 ‘스토리’에 포인트를 뒀습니다. 원래 해오던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역할에서 브랜드 전략과의 연결을 위해서는 ‘브랜드 스토리’가 핵심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일반적인 브랜드 디자인 회사가 아니라 브랜드 스토리를 구축하는 회사인데 디자인을 한다면 기존 회사들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질문은 ‘나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 입니다. 앞서 했던 두 가지 질문이 가치 추구 적인 성격이 있다면, 이 질문은 그걸 실현해 가기 위한 방안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답이 되겠습니다. 훨씬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설명이 나와야 하겠죠. 일의 범위와 영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협업은 누구와 할 것인지, 일의 프로세스는 어떻게 할 것이 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세세한 답과 기준들은 일해가면서 더 나은 방법으로 교정해 나갈 내용이 많을 것입니다. 내용의 분량도 다른 질문들보다 훨씬 많고 업데이트할 것들도 계속해서 생겨날 것입니다.

저희 회사의 경우에는 업무의 범위를 브랜딩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업무 범위를 한정했습니다. 브랜드 경험을 위한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인 해결방법에 해당하는 거죠. 협업은 프로젝트의 성격에 맞는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과 하는 걸 염두에 두었습니다. 1인 기업이지만 다인 기업과 같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 회사의 비전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한 3가지 질문에 대해 답해보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저는 사업 초기 처음이 미션을 실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만큼 신나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회사의 미래를 그려가는 일이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질문에 답해보고 비전 가이드라인까지 만드는 게 사업 초기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내 사업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막연하고 불안했던 미래가 조금은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 들죠. 물론 당장 매출에 도움은 안 되더라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는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반드시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수첩에도 좋고 휴대폰 메모장에도 좋습니다. 길지 않게 단어 몇 개로도 충분합니다. 위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짧은 답을 해보고 1인 기업을 시작한다면, 혼자가 아니라 든든한 지원군과 함께 사업을 시작하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