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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신라면인데 분식집 신라면이 집에서 끊인 것보다 열 배는 맛있습니다. 심지어 원가의 다섯배나 비싸게 주고 먹는데도 그렇습니다. 아니 비싸게 주고 먹으니 더 맛 있어야한다는 심리적 압박 때문일까요. 오늘 점심에 김밥과 함께 먹은 라면의 맛은 모자랄 게 없었습니다. 직접 먹어 본 적은 없지만, 삼만오천 피트 상공의 기내에서 먹는 신라면 맛은 더 끝내주겠죠. 분명 천상의 맛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라면인데 이렇게 맛이 차이나는 이유는 뭘까요. 단순히 끓이는 기술때문만은 아닐겁니다. 여러 중요한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라면을 먹는 장소와 그 곳의 분위기때문이 아닐까요. 혀끝으로 느껴지는 맛은 그대로지일지는 몰라도, 집 식탁의 풍경와 이 곳 분식점에서 보고 듣고 느껴지는 공기는 다르겠죠. 느낌이 다른 분위기와 기분은 맛까지 변하게 하구요.

편의점에서 진통제를 살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같은 회사, 같은 브랜드를 달고 나온 약인데, 편의점 매대에 올려져 있으니 약같지가 않았습니다. 먹어도 나을 것 같지않고 효과도 더 떨어질 것 같아서 사고 싶지가 않더라구요. 꽤나 멀리 걷더라도 약국을 찾아가서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약국에 갔는데, 많은 약 포장지들 사이에 있는 화장품은 일반 화장품들보다 더 좋게 느껴졌습니다. 저걸 바르면 손상된 피부가 금새 좋아질 것처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뭔가 더 의학적이고 전문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구요. 창백할 정도로 깨끗하고 깔끔함을 가진 약국 특유의 공간성이 깨끗한 피부로의 변화까지 연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또 이 화장품 브랜드들이 올리브영 같은 매장으로 놓여 있으니 약국에 있을 때의 느낌들이 완전히 사라져서 매력이 반감되더군요. 콘셉조차 메디컬 컨셉의 제품이긴 하지만, 약국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냥 보통 화장품의 느낌과 비슷해지도 맙니다.

온라인에서도 이런 차이는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가상의 공간이라 실제 공간성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앱을 열로 화면의 이곳 저곳을 이동하다보면 어느 정도 체감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옷을 사는데 무신사에서 사는 것과 쿠팡에서 사는 느낌은 어떨까요? 느낌이 완전 다르게 다가옵니다. 쿠팡에서 사면 대형마트에 널브러진 매장 한켠의 매대 위에서 대충 집어 오는 느낌입니다. 무신사는 다르죠. 무심히 티 한장 사서 걸치고 나왔는데, 나와 같은 티를 유아인이 입고 지나갈 것 같습니다. 어딘가 무신사 앱에서 유아인같은 멋쟁이들이 쇼핑을 하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패션 아이템이라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농산물의 경우에도 쿠팡에서 사는거랑 마켓컬리에서 사는 건 또 다른 느낌이 달랐어요.

얼마 전 생강차를 만들려고 생강을 둘러보는데 왠지 쿠팡보다는 마켓컬리에서 사서 만들어야 더 차다운 차, 건강에도 좋고 품격도 있는 차가 만들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사실 가격도 포장도 양도 다르지 않아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말이죠. 그런 느낌은 어떤 차이였을까요. 생강의 양이 부족해 동네 시장에서 사온 생강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전에 사 놓은 컬리의 생강과는 섞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색깔도 신선도도 같은 생강을 보고 그렇게 느꼈는 게 참 재밌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완성된 생강차를 마시면서도 ‘이 건 시장의 맛’이고 ‘이 건 컬리의 맛’이라고 느꼈던 말도 안되는 착각이었을까요.

결국 다른 맛을 느끼게 하려면, 그 맛을 경험하는 곳의 판과 분위기를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확실히 변화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 자체가 가진 맛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팔리고 먹을 주변의 장소와 분위기의 문제입니다.

같은 가격 600원하는 공산품인 신라면 재료가 모두 다를 리 없습니다. 그걸 누가 끓이느냐, 어디서 먹느냐의 차이인 거죠. 집에서 분식점에서 기내에서 내가 먹었던 라면의 맛이 다 달랐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겁니다. 이처럼 장소와 분위기는 맛뿐 아니라, 품질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라면 맛이 변하는 게 아니라, 장소가 변했기 때문에 맛이 변합겁니다. 

라면만 그럴까요. 사람도 그렇죠. 사실 사람 자체가 변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위치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렇게 변하는 것처럼 인생의 맛도 시간과 공간을 따라 변해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