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결보다 제안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발표 자료 표지에도 해결방안이나 보고서보다는 제안서라는 제목을 자주 씁니다. 같은 내용을 담더라도 표지에 어떤 단어를 올리느냐에 따라 회의실 공기가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해결방안이라고 적힌 표지를 본 사람은 정답을 확인하려 하고, 제안서라고 적힌 표지를 펴본 사람은 생각을 들어 보려 하기 때문일 겁니다.
해결이라는 단어에는 사이다 같은 시원함이 있습니다. 해결의 해(解)는 칼(刀)로 소(牛)의 뿔(角)을 가르는 모양입니다. 결(決)은 막힌 둑을 터서 물을 흘려보낸다는 뜻입니다. 단번에 끊고 단번에 뚫는다는 말입니다. 반면 제안의 제(提)는 손으로 무언가를 들어 올린다는 뜻이고, 안(案)은 책상을 가리킵니다. 내 생각을 두 손으로 들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상대 앞에 조심스레 내민다는 뜻입니다. 결정은 상대방의 몫으로 남겨 두는 셈입니다. 아무래도 제 성향에는 후자가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디자인 프로젝트를 할 때 안(案)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시안을 보여 줄 때 1안, 2안, 3안이라고 부르는 그 안(案)이 바로 책상 안 자입니다. 여러 개의 생각을 나란히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고객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 어쩌면 우리 일의 기본자세가 이 한 글자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고객이 어느 한 안을 고르지 않고 1안의 서체에 3안의 색을 입혀 달라거나, 2안의 컨셉에 형태는 4안으로 해달라는 순간을 한 번쯤 겪어 봤을 겁니다. 예전에는 그런 요청이 꽤 곤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이야말로 고객과 내가 책상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한층 가까워진 상태입니다. 제삼자가 내민 안을 고르는 사람에서, 자기 브랜드의 모양을 직접 만져 보고 논의하는 순간에 놓입니다.
사실 많은 고객들이 시원한 해결 방법을 원합니다. 매출이 떨어졌으니 올려 달라, 인지도가 낮으니 알려 달라는 요청이 많습니다. 고객들의 당연하고 절실한 심정을 잘 알기에 그냥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브랜딩에서 한 번에 답이 나올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할인 쿠폰을 뿌린 다음 날 매출을 확인하고, 광고를 집행한 다음 주 클릭 수로 성과를 따지는 마케팅이나 광고, 홍보와 브랜딩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브랜딩은 그 브랜드가 왜 존재하는지를 고객의 머릿속에 심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데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로고를 새로 만들었다고 해서 다음 달부터 사람들이 그 브랜드를 다르게 기억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객의 브랜딩 문제를 해결보다는 제안의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당장 빠른 길은 아니더라도 브랜드가 오래 걸어가야 할 방향을 권유하듯 슬며시 내밉니다. 첫 미팅에서 제가 자주 꺼내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 브랜드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막상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잠시 말이 없어집니다. 매일 그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에게도 의외로 낯선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침묵이 꽤나 익숙하고 반갑습니다. 답을 서둘러 내놓기보다, 그 빈자리에 몇 가지 방향을 조심스레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당신의 브랜드에는 이런 방향이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며 방향을 좁혀 나갑니다. 고객이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방향에 다시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제가 확신했던 방향이 고객의 한마디에 다른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그렇게 책상을 사이에 두고 몇 번 마주 앉다 보면, 고객의 머릿속에서 막연하던 브랜드의 미래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내민 문장을 읽던 고객이 어느 순간 자기 말로 브랜드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제가 해결사의 자세로 나섰다면 보지 못했을 장면입니다.
해결사는 답을 들고 와서 답을 두고 떠납니다. 그 답이 아무리 훌륭해도 고객이 함께 고민해 얻은 것이 아니라면, 브랜드 심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함께 책상에 앉아 고른 방향은 고객 스스로 확신이 생기고 그걸 지키려 노력하게 됩니다. 직원에게 설명할 때도, 다음 제품을 기획할 때도 그 방향을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누가 시킨 방향이 아니라 내가 고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브랜드를 오래 끌고 가는 힘은 결국 그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눈앞의 급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당장 문을 닫게 생긴 가게에 십 년 뒤의 방향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제 바람은 그 해결 이후에도 비즈니스가 이어질 수 있는 방향을 제안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답을 바로 건네는 사람보다 좋은 질문과 제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고객과 함께 그 브랜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고민하는 현명한 제안자이고 싶습니다.
| 브랜드 컨셉 빌더 ⓒ BR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