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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도 다 같은 치과가 아니다

일반 치과의원에 갈 땐 전혀 몰랐는데, 대형병원의 치과를 가보고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치주과, 교정과, 보철과, 보정과, 외과 등으로 나뉘어 있는 팻말들을 보니 치과 안에 또 다른 작은 종합 병원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처럼 의학 지식이 전무한 일반인들의 경우 치과하면 모두 이를 치료하는 곳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관련된 분께 과별 특성을 열심히 듣긴했는데 금방 까먹게 되더군요.

이런 경험을 하면서 제가 속해있는 디자인 분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자인 안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분야가 있고 전문성도 나뉘는데, 보통의 일반 사람들이 그걸 인식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친지들에게 디자인 회사를 한다고 하면 제일 많이 듣는 대답이 ‘어떤 제품’을 디자인하냐는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브랜드 디자인을 한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로고부터 웹사이트, 영상까지 브랜드에 관련된 모든 걸 다 디자인할 수 있겠구나하고 놀랍니다. 더 설명하면 말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보통 거기서 끝냅니다.

그래도 인테리어나 패션 디자인 같은 분야는 제가 속해 있는 시각디자인 분야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인식되는 편인지 그걸 한다고 하면 금방 이해하고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전 어느 모임에서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는데, 제가 헤어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 당시 제 머리 스타일이 좀 요란하고 난해하긴 했습니만 말입니다.

이처럼 ‘디자인’이라는 이처럼 광활하고 애매한 단어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 올때마다 각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의학분야처럼 독립적이고 체계적으로 나눠지진 않았지만, 디자인 영역에서도 분명히 다르고 전문성이 존재하는데 말이죠. 의사라고 모든 병을 진단하고 처치할 수 없듯이 디자인을 한다고 세상 모든 걸 디자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전문성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기초적인 내용이라 디자인 종사자이거나 디자인을 잘 아는 분들은 가볍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통계청에서 <디자인산업 통계조사> 자료를 보면 디자인 회사를 제품, 시각, 공간, 패션/텍스타일, 서비스/경험, 산업공예, 디자인인프라 총 8개 분야로 나눴습니다. 이 회사들 중 시각디자인 회사가 2천 3백개이고, 제품과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는 그 절반 정도입니다. 패션/텍스타일은 다시 제품, 인테리어의 절반 정도이구요.  디자인 회사의 종사자와 개수만 따져 보면 ‘시각 디자인’ 분야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죠. 당연한 얘기입니다. 우리 주위에 둘러봐도 어느 곳 하나 ‘시각적 디자인’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으니까요. 당장 지금 보시는 모바일의 UI도 폰트도 다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이니까요. 

디자인 분야와 전문성

이렇게 통계청에서 분류한 방법이 좋긴하지만, 시각 디자인 분야에 속해 일하면서 느끼는  현장의 느끼는 감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제 기준에서 디자인 영역을 나누고 그 영역만의 전문성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제 기준에서 디자인 영역은 크게 세개 정도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어디 문헌이나 논문을 참고한 게 아니라, 순전히 제 경험을 기반으로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디자이너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일반인들의 눈높이에서 쉽게 생각해보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시각 전반을 다루는 ‘시각 디자인’입니다. 웹, 모바일등의 화면과 인쇄매체, 광고, 영상, 서체 디자인이 이 분류에 속합니다. 사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시각’으로 규정한다면 모든 디자인 결과물이 여기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각각의 전문성이 존재하기 마련이죠.

시각 디자인은 크게 온/오프라인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인쇄, 출판, 편집물 등 등 종이라는 질감과 실물이 존재하는 디자인이 오프라인의 영역이구요. 웹, 모바일, 앱, 영상 등의 매체는 오프라인의 영역입니다. 일단 구현되는 곳이 오프라인은 주로 종이로, 온라인은 주로 화면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언뜻 오프라인을 온라인으로 그대로 옮겨 놓으면 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할 수 있지만 쉽지 않은 문제죠. 종이책이 디지털북으로 쉽게 넘어오지 못하는 걸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 같습니다. 

여전히 종이책을 읽는 사람이 훨씬 많은 이유는 종이책만의 장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겠죠. 인쇄, 출판, 편집 디자인 분야가 여전히 전문성을 가지는 것도 그런 맥락때문입니다. 종이책이 가진 장점들을 극대화해 디자인을 수행하는 곳이 편집 디자인 전문회사들입니다.

손에 쥐어지는 책이 한권 나오기 위해서는 책의 입체적인 물성과 페이지를 넘길 때의 시간의 흐름과 여러가지 인쇄의 방식과 종이의 질감까지 신경을 써야합니다. 이런 과정 전체를 잘 알고 경험해 본 디자이너나 회사가 당연히 유리하겠죠. 책 표지만 전문으로하면서 인정받는 디자이너들도 많습니다.

넌 디자이너면서 책표지 디자인도 못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할 수는 있겠지만, 이 분야 전문 디자이너들보다 잘 할 자신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분들도 제가 하는 브랜드 디자인을 못할 것도 없죠. 그런데 그 분들보다는 제가 좀 더 높은 확률로 좋은 결과물을 내 놓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온라인 영역도 마찬가지겠죠. 웹, 모바일, 앱, 영상 등이 화면에 구현됐을 때의 효과와 상호 작동 방식등의 기술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서 디자인해야 하기 때문에 오프라인의 디자인과는 생각하는 것보다 차이가 많습니다. 당연히 이 영역도 이런 구현 경험이 많은 디자이너가 유리한 건 당연합니다. 인터넷이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웹디자인을 하면서 웹의 구조성과 기능성, 인터렉션의 특장점등을 연구해 전문성을 인정받고 지속적으로 비즈니스를 해 오는 꽤 많은 웹에이전시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을 넘보는 회사들도 많지만, 신생회사들이 단번에 뛰어 넘기는 쉽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한 온 오프라인의 차이는 창의적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매체를 다루고 운용하고 경험을 설계하는 차이입니다. 개중에는 온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정말 잘하는 디자인 회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극소수입니다.

두번째는 제품과 공간이나 환경, 패션이나 공예 등 실체가 있는 디자인입니다. 주로 물성이 있고 입체적인 상품과 공간을 다루는 영역이죠. 제품과 공감과 패션을 한꺼번에 묶어내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슷한 감각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들어 카페의 공간을 떠올려 봅니다. 테이블 위에 커피 머신(제품 디자인)이 놓여있고, 손님들은 매장 테이블(가구디자인) 위에 놓인 머그컵(도자디자인)을 들고 있습니다. 점원의 유니폼(패션디자인)은 그 브랜드만의 고유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완성됐습니다. 편안하고 고급스럽게 설계된(공간디자인)에서 손님들은 여유를 즐깁니다.

이처럼 제품, 공간, 패션디자인 분야는 우리 생활 속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각을 넘어 촉각, 청각, 후각, 공감각적인 요소를 모두 고려해야하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시각을 주로 다루는 제 입장에서는 공간이나 제품을 다루는 디자이너들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디자인의 세번째는 영역은 개념과 정체성을 디자인하는 영역입니다. 브랜드 디자인, 서비스 경험디자인 등이 이 곳에 속하겠네요. 서비스 경험 디자인, 인터렉션 디자인 등은 또 다른 전문 영역이여서 제가 속한 영역인 브랜드  디자인 영역에 대해서만 설명드리겠습니다.

브랜드 디자인의 영역은 보통 ‘기업을 디자인’하는 CI, ‘제품이나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BI, 포장에 관련된 브랜드 패키지디자인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비스하는 카테고리는 이렇게 나뉘지만, 여기에 기업의 비즈니스 영역이 달라지면 거기에 따라 다시 디자인 전문회사들이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런 디자인 회사들의 전문성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외부적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잘하는 분야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회사는 공공디자인 분야에, 어떤 회사는 문화 예술 분야에, 어떤 회사는 식품브랜드나 패키지에, 어떤 회사는 화장품에 전문성이 쌓여갑니다.

디자인의 참신성으로만 판단하면 오히려 이런 경험있고 전문성있는 회사들보다 신생회사들이 더 좋을 것 같지만, 안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예를 들어 식품패키지 브랜드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전혀 이쪽에 경험이 없는 디자인 회사가 잘 할 것 같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식품이라는 산업을 잘 이해하고 식품 회사에 속해있는 무수히 많은  브랜드와의 관계도 파악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새롭고 신선한 제안을 해야하는데, 그런 노하우가 일순간에 나오지는 않죠. 더구나 식품 분야는 그래픽뿐만 아니라, 식품 법률적인 요소나 포장의 지기구조, 인쇄 방식, 그리고 사실감있는 사진 촬영을 위한 협업까지 노하우가 없으면 쉽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에 식품 기업의 디자인 외주사를 변경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령 전문화된 IT관련 서비스나 신재생 에너지 사업 관련된 디자인을 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이 분야의 실적이 있고 경험이 있는 회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좋은 디자인 솔루션이 나오기 위한 기본은 그 산업과 상품을 잘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공연 등 문화 예술관련된 포스터나 홍보물을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회사들도 많습니다. 그만큼 그 분야를 잘 이해하고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겠죠. 기관의 담당자 입장에서는 맨날 하는 회사말고 어디 새롭고 좋은 디자인 회사가 없을까?하고 찾다가도 다시 기존의 잘하던 업체에 맡기는 이유가 앞 서 설명한 전문성의 요인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문성이라는 게 어떤 경우에는 벽이 되고 새로움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전문가라는 권위를 내세워 게으르게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전문성이라는 선물은 대부분의 경우는 그 분야의 이해도와 풍부한 경험을 통해 더 좋은 결과물을 좀 더 빠르고 탁월하게 내 놓을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디자인 전문회사가 획득할 수 있는 전문성의 이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적으로 한 분야만을 한 곳만을 바라보고 관찰해 온 회사의 경험이 자산입니다. 때론 그 이유로 타성에 젖기도 하고 자기 복제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자만하지 않고 프로젝트마다 최선을 다한다면 디자인에 있어서도 전문성과 숙련도는 더 나은 결과물의 발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에 있어 전문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전문성이라는 게 처음부터 이 분야를 파야겠다고 작정해야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재밌고 즐겁게 작업하다보면 결과도 좋아집니다. 좋은 경험과 결과는 디자인 서비스 만족도를 올리는 선순환을 이룹니다.

전문성을 인정 받으며 칭찬받고 격려를 받고, 전문가로서 막힘없이 설명해주고 탁월한 해결방법을 제안해 주는 일이 디자인 ‘전문’ 회사로서 이보다 좋을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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