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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과제로 ‘나비 축제 포스터 디자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포스터가 왜 필요한지, 어떤 생각을 담아야하고,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일단 덮어 놓고 ‘나비를 어떻게 그리지?’, ‘어떤 나비를 그릴까?’, ‘붓으로 그릴까? 펜으로 그릴까?’ ‘물감이 좋을까? 아니면 컴퓨터 그래픽이 좋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첫번째 질문이 잘못되니 당연히 결과물도 산으로 갔겠죠. 시간이 한참 흘러 빛 바랜 포스터를 본가 창고에서 볼 일이 있었는데, 저 땐 왜 그것 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며 한심한 눈빛으로 포스터를 쳐다보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저에게 다시 ‘나비 축제 포스터 디자인’이라는 프로젝트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대학 때와는 출발부터가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이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낼지 차근 차근 집어보면서 시작할 것입니다.

그럼 한번 포스터 디자인을 한번 시작해볼까요?

먼저 주제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비 축제’니까 나비로 하면되지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게 결과물의 분위기와 뉘앙스까지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과연 나비 축제니까. 나비가 우선되는게 맞을까요? 당연히 ‘나비’가 주제가 되어야할까요? 하지만 실제 축제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나비보다는 나비들을 위한 ‘꽃’들이 더 많이 보일 것입니다. 이게 꽃이 주제인지, 나비가 주제인지 헷갈릴 정도로요. 그럼 나비와 꽃이 사이 좋게 어우러진 모습을 주제로해서 포스터를 만들어야할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비나 꽃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이 행사가 나비와 꽃을 주제로한 중심곤충 채집장 내지는 학습장같은 행사로 보이지는 않을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하러 왔는데 파브르 박사님의 따분한 곤충 강의 듣기를 좋아할 관광객은 없을 겁니다. 이렇게 나비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교육 중심의 콘텐츠 행사로 오해할 수 있겠죠.

그럼 나비보다는 오히려 ‘축제’에 방점을 두고 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이 행사의 최종 목적을 나비라는 매개를 통해 어쩌면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행복해하고 그 공간 안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물론 나비라는 힌트가 포스터 화면에서 완전히 빠지는 건 다른 축제와 차별화하는데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포스터 디자인은 이런 고민에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그런데 사실 결론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나비를 주제로 하되, 축제의 분위기를 살리는 디자인이면 됩니다. 나비만 표현해서는 축제라는 분위기를 살릴 수 없고, 축제만 표현하면 여타 다른 축제와의 구별이 전혀 안돼서 차별성을 갖기 어려우니까요. 결국 나비와 축제의 이미지를 조화롭게 표현하는 것이 ‘나비 축제 포스터’ 디자인의 아주 기본적이고 올바른 방향성이 될 것입니다.

물론 나비에 좀 더 힘을 주느냐, 축제의 분위기를 더 살릴 것인가는 더 세밀하고 적절한 판단이 필요해보이네요. 그런데 저라면 일단 ‘나비’보다는 ‘축제’에 더 집중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행사의 본질은 ‘나비’가 아니라 ‘축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비를 매개로 하지만, 기본적인 속성은 축제니까요. 만약 나비에 무게 중심을 좀 더 실더라도 생물로써의 나비보다는 나비하면 연상되는 아름다움, 가벼움, 하늘거리는 날개짓, 봄날의 기운 같은 발고 긍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디자인 방향성을 잡을 것입니다. 그런 감수성이 다른 축제와는 비교되는 ‘나비 축제’만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바꿔보겠습니다. 그냥 ‘나비 축제’에서 행사 명칭이 이렇게 바뀌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 파주 나비 축제’처럼 행사를 주관하는 ‘파주’라는 지역명이 들어가면 어떨까요? 나비도 있고 축제도 있고 파주도 있어야할까요? 그럼 더 요소를 추가해서 ‘2030 파주 나비 축제’처럼 개최 년도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좀 더 욕심을 내서 ‘2030 파주 통일 나비 축제’처럼 ‘통일’이라는 단어가 더해지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머리 속은 더 복잡해질 것입니다.

디자인을 하면서 이런 생각의 과정을 거치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실제 표현과 이미지화 단계에서의 디자인에 앞 서, 이런 생각의 구조를 짜는 게 중요한 이유는 어떤 주제와 테마로 디자인을 전개할 것인가? 어떤 메시지를 중심에 두고 디자인 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 결과물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 건 단지 디자이너의 실력의 문제가 아니죠. 누구나 디자인적 사고와 훈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행사의 성격에 맞는 주제가 아니고, 메시지도 특별한 게 없는데 아무리 멋진 표현과 천재적인 감각의 디자인을 한들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런 이유로 디자인을 할 때는 반드시 앞단에서 탄탄하게 생각의 구조를 짜고 설계해야합니다. 꼼꼼하게 나눠보고 분석해고 치밀한 이성이 작동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런 후 뒷단에 가서야 머리를 최대한 말랑말랑하고 감수성이 모락모락 피어나게 내버려 두는 게 좋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니라서 잘 모르시겠다구요? 만약 여기까지 포스터 디자인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생각의 계획과 구조를 짰다면 디자인의 절반을 하신겁니다. 디자인적인 사고로 충분히 절반의 디자이너가 되실 수 있습니다.

완성된 결과물까지 받아 보시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각 구조도를 가장 잘 멋지게 표현해 줄 디자이너나 아티스트를 찾으시는 일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