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한두개의 메뉴만 있는 식당을 선호합니다. 칼국수면 칼국수 하나, 설렁탕이면 설렁탕 하나, 짬뽕이면 짬뽕 하나만 하는 전문 음식점을요. 그런 식당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 별 고민없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가령 ‘한식전문’이라는 간판을 보면 멈칫하게 되더군요. 간혹 하는 수 없이 들어가보면 메뉴판에는 된장찌개부터 제육볶음까지 왠만한 한식 메뉴는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제가 주문하는 메뉴는 비슷합니다. 보통 속 편하고 탈이 없는 된장찌개를 선택하죠.

어차피 된장찌개라면 이 식당이 한식 전문이 아니라, 뚝배기 전문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긴합니다. 간판을 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제 고민이 훨씬 줄어들테니까요. 뚝배기라는 간판을 보면서 부터 이미 찌개 종류에 한정된 메뉴가 있을거고 그 안에서 결정하면 됩니다. 쉽게 고를 수 있어 선택에 쓰이는 에너지를 남길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과 힘은 음식을 더 깊이 음미하는데 사용할 수 있구요. 찌개 전문점이라고 하니 찌개에 대한 노하우와 자부심은 가졌을 거라는 기대감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은 비단 식당뿐아니라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기업에게도 굉장히 큰 고민이 될 것입니다. 한식 전문점점이라는 폭이 넓은 정체성을 잡아 시작할지 찌깨 전문점이라는 타이틀로 폭은 좁지만 깊이를 추구해갈지 말이죠.

브랜드 디자인에서 브랜딩 차원으로 –

제 경우에도 역시 그러한 사업의 폭을 결정할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사업 전에 해오던 일이 브랜드 디자인이었습니다. 기업이나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이죠. 브랜드 로고를 만들고 그 로고로 명함이나 홍보물 등여러가지 응용물에 적용하여 전체적인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주로 시각적인 결과물로 구현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디자인의 영역에 한계가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디어만 있다면 내가 제품화한 상품을 디자인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을 확장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새로운 일에 대한 갈망도 컸습니다.

하지만 십여년 해왔던 일이 브랜드 디자인 일이라서 그런 일들을 함께 계속해오게 됐죠. 그렇게 2, 3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사업 환경이 갖춰지자, 브랜드 디자인에서 더 확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게 브랜드와 관련된 디자인의 최상 위에 있다보니 결과물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각종 홍보, 인쇄물이나 웹이나 영상, 또는 공간이나 간판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거의 모든 채널이 브랜딩과 연관되다보니 일의 경계가 사실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브랜댕이라고하면 브랜드에 관련된 모든 분야가 통일감 있게 디자인되고 시스템화되는 게 이상적이긴하니까요.

그리고 브랜드 디자인의 윗단으로 올라가면 브랜드 스토리나 브랜드 전략 기획과도 맞닿아 있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니 브랜드 디자인 영역만이 아니라, 제대로된 브랜딩을 해내기 위해서는 브랜드 전략에서 스토리로 그리고 디자인으로 연결되는 토탈 브랜딩을 하는 게 맞다는 판단을했습니다. 브랜딩을 축으로 브랜드 전영역에 걸친 모든 걸 서비스하는거죠. 예를들어 브랜딩 기반의 제품 디자인, 브랜딩 기반의 공간디자인, 브랜딩 기반의 영상디자인, 브랜딩 기반의 웹디자인을 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성과가 나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토탈이라는 말의 함정 –

마침 그러던 차에 국내 유명 IT기업으로부터 신규 사업의 브랜드를 홍보할 수 있는 영상과 공간의 사인 디자인까지 할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거절을 했는데, 이번에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욕심을 내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일단 공간에 들어가는 사인디자인은 무사히 잘 넘겼습니다. 실 제작과 시공까지는 경험이 없었지만, 여러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해오면서 사인디자인 부분에 대한 이해도가 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진행한 홍보 영상이 문제였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고난의 길이 열렸습니다. 브랜딩 차원에서 홍보영상을 만들겠다고 설득해 시작한 일이긴 했는데, 생전 처음해 본 일이라 갈피를 잡기 어려웠습니다. 영상이라는 일의 시작과 끝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으니 심리적으로 불안했습니다. 영상제작사와 클라이언트 사이 중간에서 제가 PD역할을 해야하는 상황인데 경험이 없으니 진도가 잘 안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영상제작의 전과정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험이 없다보니 제작사를 이끌수도 클라이언트를 자신있게 설득할 수도 없더군요. 일은 계속 꼬이고 맴돌았습니다. 일을 하면서 그렇게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은 처음이었습니다. 터 놓고 상담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정말 답답하더군요. 제작사와 클라이언트 중간에서 양쪽 모도의 눈치를 보는 매우 난감한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영상 분야에는 PD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PD도 기획과 스토리에 관여하는 PD가 있고, 비주얼에 관여하는 아트디렉터의 역할을 수행하는 PD가 있더군요. 제가 처음부터 할일이 홍보영상의 방향을 결정하는 PD가 됐어야 하는데, 제작사만 믿고 살짝 물러서서 뒷짐만 지고 있었던 게 실수였습니다.

결국 조금 늦게라도 그걸 깨닫고 적극적으로 영상을 기획하고 비주얼 컨셉을 잡고 스토리의 흐름을 구성했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익숙해지다보니 자신감이 조금 붙더군요. 내 생각을 명확히 제작사에 전달하고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도 잘 반영해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어찌 어찌하여 한달을 예상했던 프로젝트는 3달 이상이 걸려 간신히 마무리가됐습니다. 3분짜리 영상이 그렇게 길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15초의 티비광고를 12편 찍는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영상 디자인뿐만이 아닙니다. 그 이후 브랜딩과 함께 웹사이트까지 진행했던 프로젝트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웹디자인 제작사에서는 서버를 완전히 삭제해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받았는데, 이 일 때문에 클라이언트와의 관계까지 멀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토탈이라는 말은 참 좋은데, 현실화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몸소 경험하게 됐습니다. 다 잘하려고 욕심냈다가 이런 어려움응 겪을 거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원래 해왔던 일을 더 고도화하고 서비스의 속도를 높이는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습니다.

결국 이렇게 찌개 전문점(브랜드 디자인)에서 잠깐 한식전문(토탈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꿈을 잠시 꾸다 접었습니다.

더 스페셜하게 –

그 경험이 있고 나서야 영화 제작의 시스템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제작사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새로운 팀을 꾸립니다. 그 영화에 맞는 배우, 촬영팀, 조명팀, 미술팀 등 각 분야의 최고 팀들을 모아서 영화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한 제작사가 최고의 각분야 팀들을 거느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실은 가능하더라도 비용도 엄청날 뿐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일겁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결국 저희 회사가 나아가야할 길은 토탈이 아니라, 스페셜이라는 사실을 깨닫았습니다. 브랜딩에 필요한 모든 디자인이 아니라,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분야에 한정해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길이 맞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더구나 여러명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직이 아닌, 혼자서 많은 일을 꾸려가야하는 일인기업인 경우엔 말이죠. 일의 폭보다는 깊이를 가져가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뾰족한 서비스로 고객의 인식 속에 깊이 박힐 수 있는 방안을 계속해서 고민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