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예전 디자인 회사를 다닐 때였다. 두어 시간에 한 번씩은 동료들과 잠깐씩 나가 흡연을 했다. 그 땐 나도 하루에 한갑 정도 담배를 피울 때였는데, 놀랍게도 한명 빼고 회사의 모든  남자 디자이너들이 흡연하는 상황이었다. 업무 중간 중간에 머리도 식히고 동료들과 고민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계단 가득 담배 연기만 빼면 말이다.

한 번은 함께 있던 동료 디자이너가 담배를 쥔 손으로 공중에 마치 연기로 그림을 그리는듯한 동작을 하길래 뭐하는 건지 물었다. 그 동료 대답이 디자인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있다는 거였다. 매번 아이디어를 종이나 그래픽 툴 위에 그려서 직접 확인해야하는 나로서는 꽤나 신선한 자극이었다.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머리 속에 하얀 대지를  펼쳐 놓고 아이디어를 그리고 있었던 거다. 나도 어느 정도 그럴 순 있었지만 형태를 선명하게 그려낼 정도는 아니였다. 뿌연 담배연기 마냥 대충 뭉글 뭉글하게 그려내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 정도로는 별로 도움이 안되니 굳이 더 해볼 의지가 생기질 않았다.

그러다가 그 방식이 절박하게 필요한 시기가 있었으니 첫째 아이가 두살,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였다. 회사 프로젝트는 많은데 아이들 때문에 야근까지는 할 수 없고 일단 귀가해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첫째와는 다르게 둘째는 한참을 안고 있어야 잠드는 아이였다. 빨리 재우고 남은 일을 구상해야 했는데 아이는 도무지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조급한데 시간은 부족하고. 그 때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회사 다닐 때 공중에 그림을 그리던 동료 디자이너의 손짓이었다. 맞다 그 방법으로 한번 해보자. 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아이디어 구상 시간을 늘려야하는 절박한 때였다.

그런데 막상 해보려고 하니 잘 되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어디 쉬운다. 잘 안됐다. 그리고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점점 익숙해지자 어느 정도 그려내는 게 가능해졌다. 아기띠를 메고 그 훈련늘 밤마다 반복하자 직접 손으로 그릴 때보다 오히려 자유롭고 빠르고 많은 아이디어를 발상할 수 있었다. 책상에 앉아야 컴퓨터 화면을 열어야 디자인 아이디어 스케치가 가능했던 게 그 때부턴 길을 거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의도하는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고 지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디자인 작업은 조형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일이다. 브랜드의 타입 하나를 만드는데 만지작 거리다 보면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고, 하트 모양 하나를 그리는데도 몇 주가 넘게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느낌의 문자를 그릴지 기준을 잡고, 왜 하트를 그려야만 하는지 아이디어의 근거를 만든다면 필요없는 수 십개의 스케치는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머리속으로 의도한 하트를 수십개 그려보고 지우고 하게 된다면 실제 종이나 컴퓨터 위에 그려야할 아이디어는 몇개 되질 않는다. 이미 머리 속으로 걸러낸 아이디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당연히 디자인의 속도도 빨라졌다. 밤샘과 야근도 대폭 줄었다. 한달에 한권쓰던 아이디어 노트도 세달에 하나로 줄었고, -1, -2, -3 같은 쓸데없는 아이디어 스케치 파일들도 사라져갔다. 어쨌든 머리 속 대지 위에 아이디어를 그려낼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좋은 점이 훨씬 늘어났다.

다른 디자이너들은 당연히 이런 식으로 발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조금 느렸던 나는 이 중요한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웠다. 디자인 전공 4년 실무 5년 가까이를 하고 나서야 그렇게 머리 속으로 그리는 훈련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모르겠다. 어쩌면 그 긴 숙고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는지도.

이 글을 혹시 주니어 디자이너들이나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읽게된다면 좋겠다. 종이 위에 컴퓨터 위에 기어코 그려내야만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예전의 나와같은 습관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자신의 머리 속 광활한 대지 공간을 이용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각적 능력이 기본을 넘는 사람들인 디자이너라면 조금의 훈련으로 누구라도 가능하고. 일반인도 조금만 감각이 있다면 한글을 배우듯 누구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머리 속에 다양한 표현과 아이디어를 그려낼 수 있는 도구들을 장착하게 된다면 그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생각과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 아이디어를 구상하면서 수많은 마우스질 때문에 손목이나 팔이 아픈 게 아니라, 머리 한가운데가 연기가 날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다면 앞서 말한 머리로 그리는 훈련이 잘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idea, fantasia, thought-2924175.jpg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