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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해 기업들의 의사결정 과정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큰 기업들에서는 하나의 안건을 검토하는 일에 꽤나 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의사 결정권자에게 직접 보고하면 하루면 될 일인데, 생산자에서 도매로 다시 소매에서 최종 소비자로 넘어오듯 복잡한 과정을 겪어낼 때도 많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손을 거치니 잘 보이지 않거나 놓치고 있던 점들이 밝혀질 때도 있지만, 손을 탈대로 탄 아이디어는 원래의 생생했던 기운이 사라지고 맥없이 변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신중할수록 숙성의 시간을 거칠수록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책 속의 조언들이 이럴 경우엔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모든 산업분야의 의사결정이 복잡하고 까다롭겠지만, 제가 속해 있는 디자인 분야만큼 쉽지 않은 분야 있을까 싶습니다. 디자인의 특성상 기호라는 요인까지 더해질 때는 그야말로 혼란의 장이 펼쳐질 때도 많습니다.

제가 경험 한 것 중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의사 결정의 과정을 거쳐야했던 프로젝트는 대학의 아이덴티티 작업(UI)이었습니다. 이곳은 왠만하면 피해야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보고하고 설득해야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곳이죠.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의사결정을 위한 구성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큰(大) 학문을 닦는 곳인 만큼 거기에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첫번째로는 대학 관계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야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지적인 일가를 이룬 교수님들의 논리에도 반박할 수 있어야하고, 심지어 학생회나 동문회의 의견까지 받아야합니다. 그 과정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끝이 아니죠. 총장님과 이사회의 승인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저는 브랜딩 작업이란 게 브랜드의 근본을 건드리는 일이란 걸 절감하게 됐습니다. 정체성을 결정하거나 변화의 수준을 합의해야하는 일이니 당연히 신중하고 진지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이해가 갔습니다. 이렇게나 중요한 일이니 모든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는 일도 필요하구요.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일이란 의사 결정을 ‘디자인’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한 결정적인 프로젝트가 됐습니다. 실질적인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보다, 오히려 관계자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일치시켜 나아가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게 되니까요.

의견을 모으고 분석하고, 다시 좁히고 발전시키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모든 관련자들의 머리 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하고 힘들었던 의사결정에 대한 보상으로 공통의 개념과 이미지가 떠오르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차적인 과정을 거친 프로젝트가 반드시 좋은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처음에는 좀 낯설고 어색하다는 이유로 반대 주장에 부딪쳤던 안들이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한 두사람의 강한 확신으로 올라간 개성있는 안이 평범하고 적당한 호감의 표를 얻은 안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낼 때도 많았습니다.

이런 경험들 때문이지, 저는 의사결정이 무조건 시간을 많이들여 신중하게 결정하는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차분히 준비하돼 결정을 할 때는 최대한 빠르게해야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한 기분이듭니다. 선택한 보람을 더 크게 느낍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도감 있고 긴장감 있는 의사결정이 선택을 받은 안들에게도 좋은 기운을 주는 것 같습니다.

혼자 사업을 하다보면 앞 서 말씀드린 경우 말고도 의사결정의 순간을 하루에도 몇번씩 마주하게됩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어떤 순서로 진행해야할지, 견적을 얼마의 기간으로 얼마의 가격을 책정할지, 최종으로 제안할 방안은 어떤 걸로 할지, 선택지는 얼마나 줄지 등등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오늘 혼밥을 할 식당을 결정하는 일도 사소하지만 중요한 결정이구요.

이러한 결정의 숙명이 외롭고 힘들기는 하지만, 다인 기업에 비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최대한 빠른 의사결정으로 일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한두명만 같이해도 의사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 친구들 서너명하고 약속을 잡다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코로나 상황이기도 하고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날짜 하나 잡기가 이렇게나 어렵다니요. 모두 같은 비어있는 시간을 잡는 일은 사회 생활을 하는 분이시라면 누구나 공감하실겁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기업이라는 조직 안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팀별로 개인별로 짜여진 일정 안에서 일정을 잡고 똑같은 수준의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는 얼마나 들어갈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기업 구성원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이런 의사를 전달할 시간을 정하고, 의사를 전달하고, 취합하는데 쓸 것입니다. 혼자서만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인 기업이라면 하루에도 수십건의 의사 결정을 혼자서 오롯이 자신의 판단에 의해 내릴 수 있습니다. 한가지 일에 한번의 의사결정만 내리면 됩니다. 중간에 있는 도매상을 거치지 않아도 됩니다. 의견 생산자에서 바로 결정의 소비자로 직거래가 가능합니다.

아마 조직 안에 속해있다면 보고에 보고에 보고를 해야할 때도 있고, 보고를 위한 보고 문서을 작성해야할 경우도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1인 기업은 혼자서 빠르게 머리 속 프로세스만으로도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합니다. 나 혼자서 내 안에서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은 업무 효율을 배로 올려주죠. 더 많을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줍니다.

이렇게 의사 결정의 속도와 단순성이라는 장점을 살린다면 다인 기업에 갖지 못한 1인 기업으로서의 차별성과 경쟁력을 어필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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