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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가 하는 일 중 하나인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BI)’ 작업은 보통 기본편과 응용편으로 나뉜다. 기본편은 브랜드 마크, 로고타입,색상 기준, 결합 방법, 서체 등의 디자인 기준을 수록한다. 응용편은 명함이나 봉투, 각종 광고 홍보물에 적용하는 디자인으로 구성한다. 당연히 기본편을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응용편으로 가는 게 정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렇게 순차적으로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순서대로 기본편을 먼저 제대로 만들려고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런데 다 만들고 나서 막상 응용디자인에 적용해 보면 잘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할 수 없이 기본편으로 돌아가 다시 수정해야할 때가 생긴다. 이런 경우가 많다보니 기본편은 아주 기본적인 기분만 잡아 놓고, 응용디자인을 해가면서 ‘기본’을 찾아간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들을 통일 시켜 보면서 불명확해 보였던 기본을 찾아낸다. 내 경우에는 이 방식이 작업 방식이 더 빠르고 쉬웠다.

기본을 다지고 응용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응용을 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기본을 생각해보는 이런 방식은 디자인 뿐 아니라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유용한 방법이었다.

스키를 처음 배울 때였다. 누군가에게 기본기를 배운 후 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나는 무모하게도 처음부터 중상급자로 올라갔다. 내 운동신경을 믿어 본 것도 있었지만, 그 게 훨씬 빨리 배우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상급자 코스는 초보자 코스보다 훨씬 길고 경사가 있는 코스이다 보니 넘어지고 약간 위험한 상황도 있었지만, 내려오는 과정에서 굉장히 압축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초보 코스를 너다섯번 왔다 갔다면서 배울 걸 불과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제대로된 기본을 배우는 일은 그 때 해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금방 배울 가능성이 높아졌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했던 가장 먼저했던 시도는 3000천자 이상의 글을 써보는 일이었다. 할 종일 1000자도 채우지 못하는 글쓰기 초보가 3000천자를 채워가는 건 고통을 넘어 절망스런 심정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시도를 여러 번하고 나니 1000자 정도는 쉽게 채울 수 있게 됐다. 기본기를 쌓는다고 처음부터 몇백자를 목표로 했다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이런 경험들을 하고 보니 반드시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접근하는 방법이 꼭 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직감적으로 결론을 낸 후 그 걸 뒷받침할 논리와 근거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응용을 먼저 해보고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는 시도도 하게됐다.

반드시 기본을 지켜야 완성도도 좋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했다. 물론 기본과 근본과 본질은 당연히 중요하다. 모든 일의 시작은 본질을 살피고 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맞다.
하지만 꼭 그게 찾으려고 한다고 찾아지는 건 아니다.

그럴 땐 작전을 바꿔야한다. 본질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한다는 원칙을 버리고 본질을 실행과 응용의 과정을 먼저 해보는 거다. 그런 과정에서 본질을 찾을 수도 있고 못 찾았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진정한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오히려 본질에 집착한 나머지 진도가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바에야 이런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다.

기본이 중요하다고 누구나 강조하는 이유는 그래야 제대로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에만 충실하다 정작 사용하는 방법과 때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엔 응용해보고 시험해 본 후 다시 돌아와 기본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앞 뒤 순서를 꼭 정해 놓을 게 아니라 전후의 시간을 초월해 왔다 갔다 해보면서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해보는 습관을 들인다면 지루하지 않게 오래 생각할 수 있다. 뻔하고 당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좀 다른 관점으로 기본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